책소개
우리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
≪속일본기≫는 697년에서 791년까지 95년간의 역사를 40권의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2년간의 역사를 1권 가까운 분량으로 서술한 셈이다. 이 사서는 797년에 완성된 동시대의 사료다. 그래서 비교적 상세하게 8세기의 일본사를 복원할 수 있다. ≪속일본기≫에는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나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사신에 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한 기술이 적고, ≪속일본기≫의 신라 사신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속일본기≫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고대사 사료를 보충할 수 있는 사서다.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사라는 숲을 볼 수 있는 정도라면, ≪속일본기≫를 통해서 일본 고대사라는 숲 속의 나무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지역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이웃 나라의 역사를 읽으면서 거꾸로 한국 고대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속일본기≫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이 되는 문헌이다.
천평이라는 연호로 대표되는 시기의 기록
제11권부터 20권까지는 천하태평의 소망을 담고 있는 천평이라는 연호가 사용된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당시 위정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결코 천하가 태평하지 않았다. 지진·태풍·홍수·가뭄·전염병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고, 중앙 정계의 정쟁과 반란이 빈발한 시기였다. 이러한 재해와 혼란의 시기 정점에는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성무(聖武)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황족, 등원씨(藤原氏)로 대표되는 중앙 귀족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왕위 계승의 문제와 권력의 장악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는가 하면, 정점에 위치한 성무도 결코 강력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존재는 아니었다. 신하의 반란 때문에 여러 도성을 전전하기도 하고, 자신이 부처의 종이라고 자인하면서 부처 앞에 무릎을 꿇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일본 고대사 전공자의 전문적 번역
≪속일본기≫를 번역한 역자 이근우는 일본 고대 사료를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학자다.
우리 학계는 ≪일본서기≫나 ≪속일본기≫와 같은 일본 고대 사료에 대한 학술적인 번역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본서기≫의 한국 고대사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역시 일본 고대사 전공자에 의한 본격적인 번역은 없는 상태다. ≪속일본기≫의 출간으로 우리 학계의 학술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200자평
문무천황(文武天皇)의 즉위부터 시작하여 환무천황(桓武天皇)의 연력(延曆) 10년까지 9대, 95년간(697∼791)에 대하여 기록한 40권 분량의 관찬(官撰) 사서(史書)다. 그 속에는 내량시대(奈良時代, 710∼784) 전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동시대에 기록한 사료로서 상세하게 일본사를 복원할 수 있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자료들도 들어 있어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지은이
791년 사서 편찬의 칙명을 받은 우대신(右大臣) 후지와라노쓰구타다(藤原繼繩)가 7년에 걸쳐서 광인천황대(光仁天皇代)에 정리된 사료에 첨삭을 가하고 그 후의 기사를 새로이 추가했다. 전체 40권의 정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헌상되었다. 후반부 20권은 후지와라노쓰구타다의 이름으로 796년에 헌상되었으며, 전반부 20권은 797년 봄에 당시 황태자학사였던 스가노노마미치가 헌상했다.
≪속일본기≫를 최종적으로 찬진(撰進)한 인물로 스가노노마미치·아키시노노야스히토(秋篠安人)·나카시나노코츠오(中科巨都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반도계 씨족 출신이었다. 스가노노마미치는 환무천황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환무천황의 인척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속일본기≫의 편찬에 깊이 관여했다.
옮긴이
이근우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거쳐 한국학대학원 사학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다시 일본 교토대학 일본사 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이며, 부경대학교 박물관장·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을 거쳐, 대마도연구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관심 분야는 고대 한일 관계사, 한국 고대사, 일본 고대사이며, 현재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續日本紀)≫, ≪영의해(令義解)≫ 등 일본 고대의 사료를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고대왕국의 풍경≫(인물과 사상사, 2006), ≪전근대 한일 관계사≫(방송대 출판부, 2007), ≪전통사회의 이해≫(방송대 출판부, 2008), ≪부산과 대마도의 2000년≫(국학자료원, 2010) 등의 저서를 집필했고, ≪일본사상사≫, ≪주자학과 양명학≫, ≪일본서기 입문≫, ≪침묵의 종교 유교≫, ≪지의 윤리≫, ≪지의 현장≫,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등 다수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대표 논문으로는 <桓武天皇의 母系는 武寧王의 後孫인가>(2002), <王仁의 千字文·論語 일본 전수설 재검토>(2004), <日本書紀에 보이는 五經博士와 吳音>(2010) 등이 있다.
차례
권 제11 천평(天平) 3년 정월부터 6년 12월까지
권 제12 천평(天平) 7년 정월에서 9년 12월까지
권 제13 천평(天平) 10년 정월에서 천평 12년 12월까지
권 제14 천평(天平) 13년 정월부터 14년 12월까지
권 제15 천평(天平) 15년 정월부터 16년 12월까지
권 제16 천평(天平) 17년 정월부터 18년 12월까지
권 제17 천평(天平) 19년 정월에서 천평승보(天平勝寶) 원년 12월까지
권 제18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 정월부터 4년 12월까지
권 제19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 정월부터 8년 12월까지
권 제20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 정월부터 2년 7월까지
원문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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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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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무술, 조하기를, “재변(災變)이 자주 나타나고, 질병[疫?]이 끊이지 않으니 천하에 대사(大赦)한다. 천평(天平) 7년 윤11월 17일 동트기 이전의 대벽죄 이하는, 죄의 경중 없이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형이 결정되었거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팔학(八虐)을 범했거나, 일반적인 사면의 예에 들지 않았던 자들을 모두 사면한다.”
-75쪽
계묘, 조하기를, “짐이 과박(寡薄)한데 삼가 보배로운 자리를 이어받으니, 항상 천지(天地)의 조화에 누를 끼치고 백성들의 희망을 어그러뜨릴까 두렵다. 헛되이 근심과 수고로움만 쌓이니 정사가 미흡한 것 같구나. 신(神)의 꾸지람을 듣는 것은 실로 짐으로 인한 것이다.”
-324~325쪽
가을 7월 무신, 조하기를, “이제 알리노라. 요즘 왕들과 신하들 중에서 예를 잃고 반역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계획하기를, 대궁을 포위하려고 사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거듭거듭 생각해 보아도 아무도 짐의 조정을 배반하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법대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같은 일을 여러 사람이 거듭 아뢰었지만, 문책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비로운 정치는 행하기 쉬우나, 이러한 일은 천하의 어려운 일이므로, 제정신을 잃고 헤매는 완고한 자의 마음을 자비로이 깨닫도록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이와 같이 알리노라.”
-440쪽